창립멤버에게 듣는다

 
오선용 선배

오선용 선배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부강테크 창립 멤버 6인 중 1인으로, 자타공인 사업관리와 영업의 달인인 오선배에게 창립 당시의 환경시장 분위기와 그만의 영업철학에 대해 들어 봤다.


Q. 신생 벤처기업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김선배의 회사운영 철학이 마음에 들었다. 회사와 내가 같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던 것 같다. 창립 초기, 회사는 외형적으로도 보잘것 없고 구성원도 얼마 안돼 정말 아무것도 없는 회사였다. 그러나 김선배의 진실함과 구성원들의 열정이 힘든 여정을 함께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주었다.

Q. 당시 환경시장 분위기는 어땠나?

창립 초기의 환경시장은 기술을 중시하기보다는 외국기술을 무분별하게 도입하거나 유사한 기술로 정치적인 배경을 동원해 영업하는 풍토였다. 그러나 지금은 행정이 많이 투명해지고 기본적으로 기술력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영업 프로젝트는 어떤 것인가?

개인적으로 보은 축산폐수 처리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충북에 연고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찾아가 우리 기술을 소개했다. 처음에는 담당자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팀장과 담당자가 우리 기술의 가치를 알게 되는 단계까지 진전됐다. 그러나 다른 업체의 기술을 선정하라는 상부지시에 담당 팀장이 문제가 있는 기술을 적용할 수 없다며 거부하자 다른 부서로 인사발령이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 이게 크게 이슈가 됐다.
그런 상황에서 나름 기대를 갖고 제안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담당자가 보자고 연락이 왔다. 느낌이 안 좋았다. 역시 상부지시라며 이번 사업을 포기하라고 했다. 비 오는 날이었는데 둘이 신세 한탄을 하며 소주를 엄청 마셨다. 헤어지면서 이번 건 수주 못하면 회사 문 닫아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설득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 담당자가 문제 있는 기술을 선정할 수 없다며 자기도 인사를 내달라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문제가 커질 수 있다고 판단한 상부에서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우리가 시공사로 선정됐다.

Q. 수주 후 방류수질을 맞추지 못해 나 몰라라 하는 기업도 있다고 들었다.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연구소에서 개발한 기술을 현장에 적용할 때 처음부터 문제없이 완벽한 기술은 거의 없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여부이다. 우리 부강의 강점은 문제 현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무한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BKT 브랜드가 신뢰를 받게 된 것은 차별화된 사후관리에서 고객의 믿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Q. 영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고객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객의 핵심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다음으로 부강의 기술이 그 핵심가치를 실현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제 경우는 제가 주도권을 갖고 단순히 기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멋진 예술작품을 함께 만든다는 마음으로 영업을 했다.
성공적인 영업을 위해서는 기술력은 기본, 영업은 옵션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영업에서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경쟁사의 기술과 영업전략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우리 기술이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최문진 경영총괄대표

최문진 경영총괄대표


BKT 엔지니어의 길

창립 멤버 6인 중 1인으로,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가축분뇨전문 엔지니어로 시작해 어엿한 환경업계 최초의 여성 CEO로 성장한 최문진 선배에게 BKT 엔지니어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들어봤다.


나는 환경쟁이들이 그토록 무시하는 단순 무식 토목쟁이다. 1998년 수처리가 뭔 지도 잘 모르는23살에 입사해서 설계책임, 유기성폐기물 사업팀장을 거쳐 지금은 환경업계 최초의 여성 CEO가 되었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던 신입사원에서 이 자리에 오기까지 답답하고 가슴 졸였던 순간들이 많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내부에는 늘 해답을 도출해 낼 수 있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 덕분에 나는 많은 기회를 접할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으므로 나는 이런 우리 조직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2000년 진천 가축분뇨처리시설 설치공사 팀장이었던 최호준 부장님은 내게 PM으로서 첫 시공을 맡기셨다. 시공사 협의를 갈 때마다 중년의 소장님은 딸 뻘이던 나와는 말도 섞지 않으려 하셨지만 경험도 없이 의지만 충만하던 내게 최부장님은 스스로 프로젝트를 차고 나가라며 격려해 주시고 든든한 빽이 되어 주셨다. 진천 가축분뇨 공공처리시설은 BCS 공법을 가축분뇨처리에 처음 적용한 3천(포천, 홍천, 진천) 처리장 중 하나였다. 첫 현장이다 보니 상등수 배출펌프가 처리수를 배출하지 못해 펌프 위치를 변경해야 했고, 상등수 배출장치의 부력이 너무 커 가라앉지 않자 설비를 개선해야 했고, 공법 기자재 설치가 부실하여 설치방법을 재검토하는 등 밤 늦게까지 작업등을 켜 놓고 협력업체와 현장에서 몇 날 며칠을 씨름해야 했다. 벽에 걸린 사다리를 부여잡고 BCS 반응조를 얼마나 오르락내리락 했던지… 게다가 통보 없이 몇 번의 설계변경을 거치며 마무리된 최종 처리수질은 얼마나 엉터리였던지…

진천 시공 당시에는 반응조 제어로직도 없었다. 제어반 납품은 해야 하는 데 제어로직이 뭔 지도 모르는 내게 “공정 담당자가 제어로직 정도는 그릴 줄 알아야 지!” 하시는 전기의 달인 황 동균 부장님을 붙잡고 제어로직도를 한 장 한 장 그려 내야 했다. 업력이 쌓이고 자료가 많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별 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맨 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던 그 때는 모든 것이 어렵고 흥미진진했다. BCS 공법을 처음 적용하던 당시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사건사고가 많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첫 사업을 마무리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특히나 궁하던 시기에 큰 돈이던 준공금을 받아올 땐 ‘아, 시공이 이런 맛이구나~’ 하는 쾌감도 느낄 수 있었다.

본격적인 설계를 진행하면서는 매일같이 황호재 박사님을 들들 볶아가며 수처리 프로세스 설계를 배웠다. Mass balance, 용량계산 등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쫄래쫄래 찾아가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노란 종이에 하나 둘 공정도와 계산식을 써가며 가르쳐 주시던 황박사님, 설계사에서 얘기하는 바를 이해 못해서 당황해하고 있으면 “뭔 데? 가지고 와 봐!” 하며 설계자료와 보고서들을 내밀어 주시며 지원해 주시던 김종구 부장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참고하라며 참고도서를 내밀어 주시던 유광태 차장님… 바로 이 분들을 통해서 지금의 BCS 공정의 물질수지 및 설계계산서, 보고서의 토대가 나왔다.

질산화, 탈질이 뭔 지도 모르던 내가 설계담당자가 되어 BCS 공법 설계, 제안업무를 진행해 나가고 그렇게 설계된 처리장들이 하나 둘 공사에 들어갈 때마다 처리수질이 제대로 나올 지 얼마나 가슴 졸이고 조마조마 했던지… 첫 BCS 하수처리장인 김해 진례, 생림, 한림 처리장이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도망가야 될 것 같다며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 그러던 BCS 공법이 지금은 200곳이 넘는 하수, 가축분뇨, 분뇨시설에 적용되어 운영되고 있다.
설계 프로젝트 10여건을 동시에 진행하고 제안서도 척척 만들 정도로 베테랑이 되면서 일이 더 이상 재미없던 시기도 있었다. 나보다 더 잘 하는 사람이 더 이상 없는 것 같고 배울 게 없다는 자만에 빠지기도 했던 시절, 나는 잠시 외도를 했다. 그러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했던가? 잘하는 일이 이 일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설계일을 시작한 나는 FMX, COWTT, BBF 등 보유기술도 많아지고 사업범위도 넓어지며 배워야 할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어 지금까지는 지겨울 겨를 없이 살고 있다. 지속적으로 배울 수 있고 흥미진진한 일을 하는 것만큼 행복한 직장생활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지금은 엔지니어를 넘어 경영에 이르기까지.

지금 하는 일을 지겨워하며 지쳐가는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BKT만큼 하는 일이 다양한 회사가 또 어디 있겠냐고. 설계가 지겨워지면 시공을 할 수도 있고, 시공이 힘들면 기술개발을 할 수도 있고, 이러다 저러다 잔뼈 굵으면 마케팅 전선에서 일할 수도 있고, 지금의 나처럼 경영 일선에 설 수도 있다. BCS가 싫으면 BBF를 하든지 COWTT을 할 수도 있고…^^
나는 후배들이 당장 눈 앞의 일만 보지 말고 스스로를 엔지니어로 완성시켜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길 바란다. 살아 있는 교과서 같은 박사님들, 풍부한 경험과 연륜을 토대로 명쾌한 해답을 알려주시는 선배님들, 게다가 이런 선배들이 마음씨까지 좋다. 물고기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시는 선배님들 덕분에 스스로 답을 찾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유연한 조직 덕분에 다방면의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 굉장히 좋은 조건들이 펼쳐져 있지 아니 한가!
최근에는 설계사나 발주처들도 우리를 장사치가 아닌 파트너로 여기고 사업을 논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 팬이 된 일부는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BKT를 찾기도 한다. 이에 맞춰 우리 스스로도 물질수지, 도면을 그리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충분한 기술력을 갖춘 BKT 엔지니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체 방향을 이해하고 사업의 큰 틀을 잡아 나갈 수 있도록 BKT 엔지니어로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며 이를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기본적 소양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더 맑고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은 BKT의 미션이자 내 인생의 미션이기도 하다. 나는 BKT 엔지니어로서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고객들과 더불어 더 맑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민과 논의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사랑하고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역량과 신념을 가진 BKT 엔지니어인 것이 자랑스럽다. 이제는 관리자로서 조직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후배들을 육성하며 ‘옳은 일을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함께 발걸음을 맞추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임채형 선배

임채형 선배


비결은 비전 공유

창립 멤버 6인 중 1인으로, 당시 경영총괄대표로서 대전 본사 이전 TF팀장을 맡았던 임채형 선배에게 본사이전 결정과 실행과정에 대해 들어 봤다.


Q. 당시 경영총괄대표로서 서울에서 대전으로 본사 이전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도권 소재 기업이 지방으로 이전할 경우 받게 되는 각종 세액공제에 따른 투자재원의 확보가 가장 큰 이유였다. 본사 이전을 검토할 당시, 2011년부터 향후 7년간 납부세액이 최소 57억 원에서 최대 1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세액 감면으로 생기는 재원을 그 당시 서울과 대전 등으로 분리되어 있던 사무, 연구, 생산공간 및 부대시설을 통합 확충하는 데 사용해서 회사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복리후생 강화 등 회사의 성장기반을 구축하겠다는 생각에서 결단을 내렸다.
대전을 선택한 이유는 대한민국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서 중앙정부를 비롯한 지자체, 지역 협력사 등 전국 네트워크 관리가 경제적, 시간적으로 용이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임직원들의 생활환경이나 자녀들의 교육여건 등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였다.

Q. 지방 본사이전은 큰 프로젝트다. 결정만큼 실행과정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진행했나?

2009년 초부터 경영진에서 사전 논의가 있었고 2009년 하반기에 회사 비전과 더불어 본사 이전취지를 전 임직원과 공유하고 의견 수렴과정을 거쳤다.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대체로 찬성의견이 많았던 것이 본격적으로 본사 이전을 추진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2010년 2월 사옥 부지를 계약하고 본격적인 본사 이전을 위한 TF를 만들었다. TF는 다양한 부분에서 활동이 이뤄졌는데 첫 번째가 사옥 건설과 관련된 일이었다. 사옥 설계단계부터 임직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논의하여 우리가 이용할 사옥에 대한 꿈을 사전에 공유했다. 채택된 많은 설계내용을 전 임직원들에게 피드백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예산문제 등으로 그 당시 반영되지 못한 부분도 있다. 이 부분은 아마도 우리의 성장이 계속되어 제2의 사옥을 건설하게 된다면 반드시 반영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는 우리가 살게 될 터전인 대전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공유였다. 이는 임직원 개개인이 선호하거나 처한 상황에 따라 사전 선택이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전시에서 살기 좋은 동네(생활적, 문화적, 교육적, 투자적 측면에서)를 분석 정리하여 임직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낯선 대전을 이주공간으로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현재 형성된 임직원들의 거주지는 회사에서 최초 제공했던 정보에 상당부분 기반하고 있다.

세 번째는 임직원의 조기정착을 위한 지원제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주거공간 확보를 위한 자금지원, 이주비용 지원, 교통비 지원 등 초기 생활 안정화를 위한 제도를 설계해 실행하는 것이 본사 이전 못지않게 회사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했다. 이 부분에 회사자금이 많이 투입되었지만 회사 식구들의 생활안정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회사의 성장도 힘들다는 생각으로 실행했다. 물론 회사의 성장이 예상보다 정체되어 전폭적으로 확대 시행되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본사 이전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임직원들이 처한 상황이 모두 제 각각이라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결혼 유무, 부모님 동거 여부, 자녀 유무 및 연령, 주택 소유 여부 등 개개인들이 처한 상황들이 지방생활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라는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특히 취학자녀를 두고 있던 임직원들은 막판까지 결심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 당시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오는 결단을 보여준 임직원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회사에서 장려했던 기혼 가족들 중 동반 이주를 결정해준 임직원들이 성공적인 본사 이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Q. 대부분의 임직원들이 대전으로 함께 내려오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창업 이래 지속적으로 진행해온 회사비전의 공유다. 둘째는 본사 이전 과정의 직원 참여와 피드백, 셋째는 회사가 한 명 한 명 개별면담을 통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득한 덕분이다. 모두가 다 같이 갈 수는 없지만 회사의 비전에 동의하는 직원들은 최대한 함께 간다는 생각으로 추진했다. 그렇게 추진하다 보니 두 사람을 제외하고 전부 다 내려오게 됐다. 결론적으로 그 당시 내려온 모든 임직원들은 회사의 비전에 동의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Q. 대전 본사 이전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내부적으로는 열악했던 근무환경이 크게 개선되어 임직원들의 근무만족도가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의 근무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어떻게 근무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1인당 1평도 되지 않는 사무공간과 남녀 공용화장실, 모유 수유를 하던 여직원이 화장실에서 유축기를 사용해야 했던 현실은 우리에겐 너무나 불편한 진실이었다. 임직원들의 시각에서 필요한 시설들을 먼저 생각하고 불편했던 부분들은 철저히 개선하고 최대한 쾌적한 환경으로 사옥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외부적으로는 대외 신인도가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사옥이라는 외형만으로 이 부분이 평가되지는 않겠지만 방문해 주시는 고객들의 수와 만족도에서 확연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서울보다 생활이 훨씬 여유로워졌다. 출퇴근 시간이 단축되었고 회사 체력단련실을 쉽게 이용할 수 있어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물론 서울에 있는 지인들과 친구들을 자주 볼 수 없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21 bkt20년사